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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More Equal Animals - 3장

제3장 - 진정한 민주주의

이 책을 읽는 당신은 당신의 한 표가 투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가? 현재 정치 시스템을 신뢰하는가? 정치인을 얼마나 믿는가? 지역구 의원에게 메일이나 문자, 편지를 보낸 적이 있는가? 그래본 적이 있다면 자동 답장이 아닌 제대로 된 답을 받아본 적은 있는가? 다수결은 항상 옳은가? 도시가 시골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져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 이것이 맞다면 차라리 중국과 인도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맞는 건 아닐까?

민주주의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표방한다. 그러나 같은 "민주주의"에도 직접 민주주의, 숙의 민주주의, 대의 민주주의, 민주적 공화주의 등 여러 형태가 있으며, 각각의 민주주의는 저마다 민의를 "대변"하는 “공정한” 결과를 산출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표를 센다”.

"민주주의는 가장 덜 나쁜 제도일 뿐"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지만 모든 “민주적” 정부가 동일한 수준으로 평등할까? 아니면 다른 정부보다 “더 평등한” 민주적 정부도 존재할까? 민주주의 중에서도 "민의"를 더 잘 대변하고, 정부를 변화시킬 시민의 권리를 더 잘 보호하는 민주주의가 있진 않을까?

민주주의는 다수의 합의에 의거해 사회를 통치하는 체제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우리의 시스템이 망가져 있다는 사실 뿐이다. 양당제와 중앙화된 미디어 카르텔이 우리에게 쥐어주는 선택권은 모두 잘못되어 있다. 정부가 선거를 관리한다는 것이 선거가 민주적 원칙에 따라 주관될 것임을 필연적으로 의미하지는 않는다. 독재자들마저도 선거를 통해 집권을 이어가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선거 규칙이 부정을 걸러낼 수 없다면 선거의 쓸모는 어디에 있는 걸까?

나는 현대의 "민주주의"를 DINO(Democracies In Name Only; 이름 뿐인 민주주의)라고 이해한다. DINO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집어삼키는 "공룡(DINOsaur)"같은 통치 시스템을 말한다. DINO 체제 아래에서 진정한 여론과 민의는 은폐되며, 숨어 있는 (혹은 그렇지 않은) 극소수의 독재자들에 의해 마치 모든 게 모두의 합의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조작된다.

제이슨 브레넌은 자신의 책 <민주주의에 반대한다>(Against Democracy)를 통해 DINO가 사회를 망치는 모든 방법을 잘 요약한 바 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나타나는 흔한 문제들이 궁금하다면 브레넌의 책을 읽기 바란다. 여기에서는 브레넌의 핵심 주장 몇 가지만을 요약하고자 한다.

브레넌은 일반 시민들의 정치적 무지가 가히 충격적인 정도라며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더러는 정치를 잘 알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리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무지하다.” 정치학자 래리 바텔스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 유권자들의 정치적 무지는 정치학계에서 가장 논문이 많이 나온 주제일 정도로 큰 이슈이다.” 유권자의 정치 상식을 시험하는 테스트에 따르면, 응답자 중 25%는 정치에 대해 잘 아는 것으로, 25%는 잘 모르는 것으로, 25%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25%는 구조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습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브레넌은 말한다.

브레넌이 말하는 주장은 다음 사례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당신이 ‘백만장자가 되고싶은 사람(Who Wants to Be a Millionaire)?’(미국의 퀴즈쇼)에 출연했다고 생각해보자. 호스트가 당신에게 백만 달러짜리 질문을 던진다. “2000년 대선에서 낙태권에 찬성했던 후보는 엘 고어, 조지 부시 중 누구일까요?” 당신은 답을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호스트가 당신에게 찬스 사용을 제안한다. 당신은 동전 던지기 찬스, 혹은 무작위로 추첨된 2000년도 미국 대선 유권자로 연결되는 전화 찬스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 이때 당신은 동전 던지기 찬스를 골라야 한다. 왜냐면 그것이 정답을 맞출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정치적 무지가 무지함을 뛰어넘어 무작위 추측보다 못한 상황이라면, 민주주의가 어떻게 시민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할 수 있단 말인가?

브레넌이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이유는, 보통의 민주주의로는 좋은 거버넌스 결과가 산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책은 비교적 합리적이고 똑똑하다는 사람들도 피해갈 수 없는 모든 인지적 편향을 망라한다. 또한 부족주의의 작동 방식과 정당 형성 방식을 분석하고, 어떻게 정치적 논쟁이 타협이 아닌 여론 양극화로 이어지는지 보여준다.

이를 통해 브레넌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식견 있는” 사람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정의하는 "식견 있음"은 굉장히 넓은 개념이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난 그의 문제 진단에는 동의하나, 그가 실행 가능한 솔루션을 제안했다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문제는 식견의 부족이 아니다. 시민이 "정치적 식견"을 갖추면 민주주의의 문제가 해결될 거란 기대 자체가 문제이다. 어쩌면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정치적 식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유권자들이 이미 저마다 알고 있는 것에 관한 것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투표가 민의를 투명하게 반영하려면 모든 유권자가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건 너무도 큰 기대이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특별하고 가치 있는 지식이 있다. 올바른 투표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전부 알고 있는 유권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참된 민주주의라면, 유권자들의 집단적 지혜가 구조적으로 보호되고 활용되는 절차가 시행되어야 하며, 광범위한 지식 없이도 유권자들이 건강하고 독립적인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의 수준을 평가하기에 앞서 우리는 우리가 정부를 통해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부터 제대로 정립해야 한다. 합리적인 사람들조차 정부가 가지는 권한과 목적을 둘러싸고 격렬한 갈등을 겪는 것은, 보통은 이러한 근본 가치에서 서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권한과 목적은 헌법을 근거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상 사회 건설을 위해 정부에 최대한의 전제적 권한을 허락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정부 권한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에 관한 동의가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그 권한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 사용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논의도 계속해 나갈 수 있다.

정부의 권한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나는 말을 아끼는 편이다. 내 관심은 거의 오로지 정부의 권한이 어떤 절차에 의해 개인 수준에게까지 위임되는지에 있다. 결국 모든 의사 결정(행정 명령, 법률, 판결, 등)은 결국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 개인들의 선택이 사회의 운명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자유의지적(libertarian) 원칙을 가진 전제적 종신 독재자가 이끄는 사회는 마르크스주의적 전제적 종신 독재자가 이끄는 사회와는 판이하게 다를 것이다. 민주주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선출자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민주적 절차의 형태, 그 일관성, 그리고 유권자의 도덕성에 따라 저마다 다양한 결과가 산출될 수 있다.

정부의 권력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논쟁은 분열을 일으킬 수 밖에 없으며, 이것은 현재의 두 다수당이 권력을 쥐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정치 현안에서 한 걸음 물러나 새로운 합의 도달 프로세스를 정착시키는 데 마음을 모아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이 프로세스를 통해 극단적 폭동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공동의 의사 결정이 가능해질 것이다. 합의야말로 한 의사 결정의 타당성을 대중에게 설득할 수 있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선거를 치르든 치르지 않든 모든 조직은 궁극적으로 리더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로 이루어지며, 힘과 권력의 위임도 이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러한 권력의 위임은 사회에 따라 선거 결과 뿐 아니라, 공포심, 존경심, 인기도, 혹은 출신 가문을 기준으로도 정해질 수도 있다. 권력 위임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공동체란 없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가능한한 가장 좋은 (혹은 가장 덜 나쁜) 권력의 위임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모든 권력은 동의에서 나온다

정부의 모든 권력은 시민의 동의에서 나온다. 이것은 최악의 독재자가 통치하는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부패한 독재자나 정당으로부터 해방되려면, 누구에게 다시 권력을 위임할지에 관한 새로운 합의가 최대한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도출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거버넌스의 문제를 합의 도출의 문제로 재정의할 수 있으며, 성공한 사회란 시민이 새로운 합의에 도달할 권리를 보호하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부패한 정부일수록 시민들이 새로운 합의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는 조치들을 제도화하며, 이로써 자신들이 (기존의 합의 도출 시스템으로 획득한) 권력을 지킨다. 사다리를 걷어차기다. 이는 대개 검열과 프로파간다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더러는 평화적으로 새로운 합의를 조직하려는 사람들에게 옥살이와 죽음을 강요하는 형태로도 나타난다. 우리는 정부가 어떤 정보를 검열하고 있는지를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검열되는 정보들은 대개 기득권을 위협하거나 우리가 꼭 알아야 될 정보이기 마련이다. 진실은 검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거짓은 진실의 검열에서 시작된다.

현 정부가 부패했으며 사회 제도가 더 이상 공공의 이익을 섬기지 않는다는 데에 절대 다수가 동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70%가 실제 그렇다고 믿는다고 한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해결책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다. 부패한 권력은 의도적인 프로파간다와 파벌화를 통해 시민의 집단 행동을 방해한다. 과연 부유세 납세자가 복지 수혜자와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정부 지원 프로그램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밥을 떠먹여주는 사람의 손을 물 수 있을까?

부패한 정치 시스템은 자신의 부패를 뜯어고칠 수 없다. 시민들이 정부에 자리를 꿰차고 있는 "악역"들을 다 없애버리고 그 자리를 "선역"으로 채워넣는 것이 이론적으로야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이러한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봐야한다. 이것은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이 부패해서 생겨나는 문제인 동시에 "선"과 "악"의 의미에 대한 합의가 없어서 생겨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건국 공신들은 독립선언문에서 기존의 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체제 세워야 하는 이유와 그 정당성을 역설한다. 현대 사회에서 독립선언문에 나오는 창조주, 자연의 신에 의해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 받은 것이 정말로 "자명한 진리"인지에 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 있겠지만, 독립선언서에 담겨있는 취지의 골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즉, 어떤 형태의 정부든 그것이 시민의 의사에 반해 파괴성을 나타낸다면 시민들은 그 정부를 바꾸거나 폐기할 권리를 가지며, 자신의 안녕과 행복에 가장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원칙을 토대로 새로운 정부를 세우고, 그 권력을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독립선언문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미국 독립선언문

인간사의 진행과정에서 한 국민이 자기들을 타자에게 얽메이게 하는 정치적 속박을 해체하고, 그리하여 스스로 지상의 열강들에 끼어 자연의 법칙과 신의 법칙에 따른 독립적이고 평등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필요하게 될 때는 인류의 의견들을 예절 있게 존중하면서 자신들이 독립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선언해야만 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자명한 진리로 믿는 바,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된다는 것, 그들은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일정한 권리를 부여 받는다는 것, 그리고 이에는 삶, 자유 및 행복의 추구 등이 포함된다는 것, 이러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간들 사이에 정부들이 수립되며, 이들의 정당한 권력은 피치자의 동의에 연유한다는 것, 어떠한 형태의 정부라도 그러한 목적들을 파괴하는 것이 될 때에는 그 정부를 바꾸거나 없애버려 새 정부를 수립하되, 인민들에게 자신들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잘 이룩할 것 같이 보이는 그런 원칙들에 입각하여 그 토대를 마련하고 또 그런 형태 하에 권력을 조직하는 것이 인민의 권리라는 것 등이다. 사실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는, 수립된 지 오래된 정부는 사사로운 일시적 이유로 바꿔서는 안되며, 또 모든 경험에 의하면 인류는 악폐라 할지라도 그것을 견딜 수 있는 동안은 자기들에게 익숙한 (정부) 형태를 폐기함으로써 그러한 악폐들을 시정하느니 오히려 참고 견디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항상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부조리와 권리 침해를 끊임없이 일삼음으로써 국민을 절대적인 전제 하에 묶어두려는 의도가 분명할 때는 국민들은 그러한 정부를 떨쳐버리고 자신들의 미래의 안전을 지켜줄 새로운 수호자들을 마련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독립의 선언은 권력자에게 특권이나 양보를 요구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종속을 위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스스로는 만들어 낼 수 없거나 만들어 낼 의사가 없는 물건과 서비스를 타인을 겁박해 얻어내겠다는 것이다. 독립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책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립의 반대는 종속이다. 독립은 자유의 필요조건이다. 자유가 없다면 노예다. 우리의 삶을 우리 자신이 책임지지 않는다면, 우린 우리의 삶을 대신 책임져 줄 그 사람에게 종속되고 만다. 우리의 노예됨은 우리의 종속됨과 함께 자라나며, 우리의 자유는 우리의 독립과 함께 자라난다.

우리 사회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은 빈번하게 이야기하는 반면, 독립을 위한 싸움은 거의 거론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롭다. 독립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토대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독립 없이 자동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독립은 자주성, 책임을 필요로 한다. 자유와 독립의 결정적 차이를 이해하려면, 책임이 자신이 가진 자유를 침해한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된다. 예컨대, 직장에 나가야 한다는 나의 책임이 내가 TV를 볼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야기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이들은 타인을 노예로 만들고, 그에게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 내가 공짜로 TV를 보기 위해, 다른 누군가가 직장에 나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독립은 합의의 전제조건이고, 합의는 정당성을 갖춘 민주 정부의 전제조건이다. 독립을 위한 싸움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자유를 위한 싸움도,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도 불가능하다. 개인의 독립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

십대는 자기만의 삶을 살 "자유"를 원한다지만 부모와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아가며, 부모님이 해주는 밥을 먹고, 부모님이 주는 용돈을 받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종속 상태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누군가의 자유를 빼앗아 내 자유를 누리려는 것과 같다. 진정한 자유를 원한다면 이 십대 아이는 부모님 집에서 나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많은 경우 아이들은 한참 머리를 굴린 끝에 아직은 자신이 완전히 독립적인 삶을 살아갈 준비가 안 됐음을 깨닫는다. 이 아이는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게 되기까지 아직 한참을 더 배워야 하며, 지금 자신이 부모님으로부터 “공짜로” 누리고 있는 것들을 제 힘으로 해결하려면 시간과 에너지를 희생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 부모님이 죽은 순간부터 이 아이는 싫든 좋든 스스로의 삶을 책임져야 하며, 그렇지 못한다면 그 역시 죽게 될 것이다.

십대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독립이다. 독립된 개체로서 스스로 결정을 내릴 권리를 원하는 것이다. 독립된 개체로서의 삶에 뒤따르는 책임을 질 수 없는 경우, 하나의 대안이 있기는 하다. 룸메이트를 구해서 함께 사는 것이다. 이 아이는 이제 부모의 독재(이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속해 있던 “정부”)로부터 벗어나, 룸메이트들과 합의를 통해 만든, 좀 더 받아들일만한 규칙(그와 그의 룸메이트들 사이에서 체결된 “평화 조약”) 아래에서 살아간다. 아이는 여전히 집안일을 거들어야 하고, 밤이면 소음을 조심해야 하며, 맘대로 집에 친구를 초대할 수도 없겠지만, 타협 자체가 불가능했던 부모님과 함께 살 때보다는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 아이는 자기 몫의 월세와 관리비를 감당해야 하며, 그렇지 못하는 경우 다른 룸메이트에 의해 집에서 쫓겨날 것이다.

독립을 위한 싸움은 스스로를 책임질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다. 상대의 독립을 막는다는 것은 강제로 집안일이나 가족 사업을 시키기 위해 아이를 집에 가둬두는 것과 같다. 룸메이트들이 당신이 이사나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이사를 나가면 지불해야 할 월세에 구멍이 나기 때문이다. 영국이 식민지들의 평화로운 독립을 거부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미국 북부가 남부의 독립을 거부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노예 소유주들이 노예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도 마찬가지다.

많은이들이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독립 전쟁을 위한 선전포고문 쯤으로 여기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독립이란 일종의 마음의 상태(state of mind)이자 존재의 상태(state of being)로, 이 상태로부터 나온 행위는 현 체제에의 종속을 경감시키면서도 새로운 합의 시스템을 조직하고 지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부모에 대한 의존도가 클수록, 독립적인 삶, 책임지는 삶에서 비롯되는 자유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권력자들로부터 해방되고 싶다면 우선 그들에 대한 종속 상태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삶, 공동체, 사회를 책임 질 수 있어야 한다.

독립된 인간으로서 실천할 수 있는 첫 번째 행동은 이웃에게 다가가 새로운 사회 계약, 새로운 합의 도출 절차를 만드는 일에 함께하자고 초대하는 것이다. 이 책은, 기존의 시스템보다 나은 새로운 민주적 정부를 세울 수 있는 원칙을 바탕으로, 공동체 내에서 새로운 합의를 도출해내는 길을 여러분과 여러분의 이웃에게 보여주면서, 이를 세계에 개진해 나갈 로드맵을 제시할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떠한 정부 시스템도 완벽할 수는 없으며, 심지어는 최선의 정부조차 통치되고 있는 시민들이 가지는 가치관에 의해 그 운명이 결정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수단이 결과를 정당화한다

다양한 “민주적” 절차 중 독립된 사회를 건설함에 있어서 최선의 절차는 무엇이고, 그것을 결정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를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결과에 대한 개별적인 예측을 바탕으로 시스템의 유효성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에게는 어떤 수단의 좋고 나쁨을 그 수단이 가지고 올 결과의 좋고 나쁨에 따라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견제되지 않는 민주적 권력은 소수자에게 언제나 위협이 된다. 소수 의견자들은 이에 따라 자신의 "권리"와 정부 권한의 "한계"를 강조할 수밖에 없다. 위정자들이 헌법이 규정하는 정부의 한계를 무시한다면 시민들은 들고 일어서게 될 것이며, 이렇게 되면 위정자들도 별 수 없이 한 발 물러설 것이다. "민선"과 “선거인단 투표” 중 어떤 제도가 더 정당성을 가지느냐를 둘러싼 논쟁에서는 대개 논쟁의 당사자가 어떤 정치 파벌에 속해 있느냐가 중요하다. 선거철이 올 때마다 사람들의 입장이 바뀐다는 것은 이들의 입장이 원칙에 근거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믿음은 인종 학살과 전제주의적 유토피아 사상의 씨앗이다. 수단은 그 자체로 정당화되어야 하며 커뮤니티의 합의에 합치되어야 한다. 수단은 자체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결과를 산출해야 한다.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 수단을 거부할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목적"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수단만이 존재하므로 수단은 그 자체로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특정한 "목적"이 있다는 것은 이 목적에 맞게 무언가를 바꿔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며, 자신들 외의 다른 누군가가 권력을 획득하는 것을 거부하리란 것을 함축한다. 이 경우 민주주의는 가능하지 않다.

사회란 개인들이 모였을 때 나타나는 창발적 특성이고, 그 구성원들은 공생적 관계를 맺는다. 개인은 사회와 분리되어서는 살아갈 수 없으며, 사회 또한 개인이 모여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 운영에 있어서의 어려움은, 아무리 정부가 사회 전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 정부를 운영하는 것은 언제든 사회로부터 양도 받은 권력을 사적 이익을 위해 오남용할 수 있는 개인들이라는 데 있다.

정부가 개인의 이익에 복무할 때 발생하는 문제는, 정부가 한쪽 편이 가진 것을 빼앗아 다른 한쪽 편에게 나눠줄 때에 더욱 은폐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49%에게서 빼앗은 혜택으로 51%를 매수하는 극소수의 집단이 민주주의를 망가뜨린다. 정부는 일부의 이익이 아니라 모두의 이익에 복무해야 한다. 그리고 정부가 모두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는지는, 특정 결과를 통해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달성한 수단으로 판단될 수 있다. 요컨대, 내전을 치르지 않고도 소수자의 분리 독립을 허용하는 정부라면 모든 시민의 동의를 얻으며 모든 시민을 섬길 수 있다. 정부가 섬기지 않는 시민들은 분리 독립해버리면 된다.

그렇다면 목적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시스템을 판단할 수 있을까?. 새로운 절차를 도입하는 것도 결국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인데, 이것마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던가?

현명하며 자비로운 철인이 다스리는 독재 국가를 떠올려보자. 이 철인 독재자가 살아 있는 한 백성들은 행복할지 몰라도, 그가 죽고나면 언젠가는 사악한 독재자가 왕좌에 올라설 것이다. 오만한 야심가들에게는 현재의 자비로운 독재자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 권력을 잡는 가장 편한 방법일지 몰라도, 이는 장기적으로는 결코 지속가능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니며, 따라서 거부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시민들이 민주적인 절차를 따라 자신의 권력을 통치자에게 위임하는 과정은 자비로운 독재 국가의 백성이 왕을 세우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어떠한 민주적 절차로부터도 최적의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민주주의에서 선출되는 지도자도 결국은 어느 정도는 선하고, 어느 정도는 악한, 어느 정도는 지적이며, 어느 정도는 무식한 시간제 독재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컴퓨터 공학과 마찬가지로 정치에서도 알고리즘 디자인은 최선, 차선, 최악의 결과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결국 알고리즘이 가정하는 최악의 결과가 실현되고 말리라고 보는 것이 안전하다. 처음으로 헌법을 입안한 미국의 "철인"들의 원래 뜻도 불과 두 세기만에 그 의미가 퇴색되고 말았다. 이는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에서 물러났던 바로 그 순간부터 예견된 일이다.

민주주의의 정당한 권력은 민주적 절차에 대한 시민의 동의에서 나오는 것이며, 여기에는 소수자들이 분리 독립할 권리가 필연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다수 의견이 소수 의견을 잡아 먹지 못하도록 막는 것도 이러한 독립의 권리 때문이다. 개인 의견은 가장 궁극적인 형태의 소수 의견이다. 민주주의란 늑대 두 마리와 양 한 마리가 저녁으로 뭘 먹을지를 두고 투표하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도 있다. 양은 투표 선택지에 양고기 음식이 제외되었을 때만 이 절차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늑대가 양고기를 먹자는 데 표를 던지더라도,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권리에 의해 양은 뒷목을 물리지 않고 분리 독립할 수 있다.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동물의 세계에서라면 양은 결국 늑대들에게 뜯어 먹히고 말겠지만, 정당성을 가진 민주주의에서라면 이런 일은 벌어져선 안 된다.

물론 양은 자신의 털과 젖을 주는 대신 늑대에게 신변 보호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핵심은 타협 시스템에 대한 자발적인 동의와 자발적인 거래이다. 민주주의의 대전제는 시민에게 주권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표를 던질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시민에게 주권이 있다는 것과 동일하지는 않다. 만약 선거에서 후보로 나온 사람들이 전부 "매파"라면, "비둘기파"인 사람들은 이 선거에서 어떤 주권을 행사할 수 있을까? 시민들이 미디어가 밀어주고 있는 이들 외에 다른 후보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면, 시민의 주권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여론의 인식이 중요하다

좋든 싫든 사회는 군중에 의해 움직인다. 폭동이 일어난 상황에서 개인의 재산권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독재 정부조차 여론이 등을 돌린다면 오래 버티지 못한다. 여론을 변화시키고 지지를 얻어내지 못한다면, 인종 학살을 자행하지 않는 한 그것이 자유주의적인지, 사회주의적인지, 무정부주의적인지, 마르크스주의적인지와 상관없이 유토피아는 이룩될 수도, 지속될 수도 없다. 다양한 의견을 용인하지 못하는 사회는 취약하고 지속불가능하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 자신만의 독립적인 판단이 아니라 남의 의견에 의존해 자신의 의견을 형성한다. 나 역시 22살까지 나만의 "의견"이랄만한 것을 가지지 못한 채 가족, 친구 등 타인의 "의견"에 휩쓸릴 따름이었다. 하지만 나의 가족과 친구들 중에서도 역시 독립적인 사고에 의해 자신의 의견을 형성한 사람은 없었다. 마치 맹인이 맹인을 안내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우리는 매일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탕으로 의사 결정을 내린다. 스타일, 언어, 도덕관, 종교, 정치 성향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타인이 실제로 생각하고 있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우리가 상대에게 무슨 말을 할 때도, 우리가 상대에게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기에 상대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확신이 들지 않을 때면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에 자신의 의견을 의탁한다. 그리고 우리에겐 확신이 들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민주주의 체제를 따르고 있는 이유도 대부분 이와 똑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모두의 생각을 물어볼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기나 한 걸까? 내가 먼저 나의 의견을 말하지 않고서도 남들이 자신의 의견을 기꺼이 내게 밝힐 수 있을까?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누군가가 조작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과, 실제로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다르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일부 고도화된 여론 조작 기술들은 여론 조사 및 보도 과정을 오염시킴으로써 작동한다. 주요 미디어를 통제해 소수 의견을 실제 다수 의견에 비해 더 지속적으로 더 노출한다면, 대중은 결국 이 소수 의견을 다수 의견으로 받아들인다.

가장 노골적인 여론 조작 시도는 선거에 앞서 이루어지는 "과학적 여론 조사"에서 이루어진다. 미디어는 누가 "뽑을 만한 사람"이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를 우리 머리에 주입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적” 여론 조사 결과가 발표되면, 사람들은 실제와는 상관 없이 어떤 후보가 인기가 있고, 어떤 후보가 인기가 없는지 결론을 내린다.

소수로서의 자신의 의견을 다수자 앞에서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겉으로는 다수 의견이라 여겨지는 것을 지지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이것에 반대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사람들은 "다수"의 눈에 “좋게” 비춰지기를 원하며, 제가 가진 의견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따돌림당하고, 소외되고, 창피당하는 걸 두려워한다. 사회에 침묵하는 고통, 다수의 압제가 반복되는 자기 강화적 순환이 발생하는 이유이다.

상대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가 미트로프라는 착각에 일요일 저녁마다 미트로프를 해먹으며 말 못할 괴로움을 느끼는 부부의 사례와 유사할 것이다. 양쪽 다 (상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미트로프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숨긴다. 그 결과 이 부부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일요일 저녁마다 미트로프를 먹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상대가 진정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이런 불필요한 고통이 생길 수밖에 없다.

솔로몬 애쉬는 1951년에 순응과 관련한 실험을 진행했다. 솔로몬은 피험자로 가장한 실험공모자들을 심어둔 방에 실제 피험자들을 들이고, 이들에게 선분의 길이를 비교하는 "시력 검사"를 수행해 줄 것을 부탁했다. 앞서 솔로몬이 심은 공모자들이 먼저 나서서 명백한 오답을 답으로 제출한 후 실제 피험자들이 답을 제출했다. 실험을 몇 차례 진행한 결과, 75%의 피험자들이 적어도 한 번씩은 자신이 실제 인식한 것과 상관 없이 그룹의 의견에 순응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평균적으로 3분의 1의 피험자들이 명백히 오답을 말한 다수의 의견에 동조했다. 반면 질문이 개별적으로 주어졌을 때 피험자들의 오답률은 1% 정도에 불과했다.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도 위의 실험과 마찬가지로 공모자들이 심어진 가상의 방에 우리를 몰아넣는다. 여기에 나의 의견이 얼마나 흔들리게 될지 상상해보라! 이것은 사실 공모자들이 없어도 가능하다. 일부 소수 의견을 의도적으로 노출시키는 것만으로도 다수 여론은 충분히 왜곡될 수 있다.

사람들의 행동은 여론에 대한 인식을 통해 형성된다. 조용한 다수의 기를 꺾으려면 이들이 자신을 소수 집단으로 여기게 만들면 된다. 여론에 대한 인식을 통제함으로써 엘리트들은 실제 여론을 왜곡하고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을 소외시킨다.

다수의 지지를 받는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한다면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여론 측정 방식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평화 혁명을 향한 첫 걸음은 여론에 대한 진실된 인식의 촉진이다.

이를 위한 한 가지 접근 방식은 왜곡이 불가능하며 지속적인 비밀 여론 조사를 실행하는 것이다. 타인이 정말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만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시민들 사이에 생각보다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민들이 여전히 자신의 의견을 독립적인 판단이 아니라 미디어가 생산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형성한다면 이마저도 소용없을 것이다.

진정으로 민주주의적인 체제라면 시민으로부터 정직하고 독립된 의사를 수렴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대부분의 사안에 대해 무지하고 자신의 의견이 아닌 것을 자신의 의견으로 믿는 한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사회에서 여론이란 결국 주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오해의 총합에 불과할 것이다. "모두가 모두를 따라가"고 있지만, 몇 블록을 걷다 결국에는 그 누구도 자신을 이끌고 있지 않았음을,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아는 사람이 실은 아무도 없었음을 깨닫는 것과 같다. 여기에 대해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프로파간다에 능한 극소수가 자신들의 사적인 목표를 위해 전체 사회를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의도적으로 여론이 왜곡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시민 사이에서 합의가 도출될 수 있을까? "군중"이 피리부는 사나이에 이끌려 아무런 독자적인 의사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면 민주적 절차란 어떻게 합의될 수 있을까? 이러한 피리부는 사나이의 영향력을 최소화할 수 있는 민주적 절차를 구성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아나키스트들은 자신들이 법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에 반대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들이 원하는 법이란 무엇인지 물어본다면 여기에 대한 이들의 답변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만약 합의된 법이 어겨졌을 때는 어떻게 하겠느냐 물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법치주의"를 신뢰한다 하더라도, 어떤 법을 만들 것인지, 그리고 그 법이 어겨졌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우선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법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자체만으로는 집행될 수 없으며 홀로 분쟁을 해결하지도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 "법"은 규칙이 만들어지고 분쟁이 해결되는 과정 자체이다. 그래야지 비로소 법치란 이 과정을 집행하는 실체로서 기능할 수 있다. 이것이 성공을 거두려면, 민주적 절차의 위반 여부가 흑, 아니면 백으로 최대한 객관적으로 판단 수 있어야 하고, 이로써 민주적 절차를 위반한 혐의가 있는 누군가의 유, 무죄에 대해(유죄라면 권력을 박탈하고, 무죄라면 권력을 유지한다) 대중이 쉽게 합의의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객관적인 "법"을 통해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는 "법치"의 이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다. 블록체인 세계에서는 "코드가 곧 법"이란 말이 있다. 코드가 허용한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단 이야기이기도 하다. 블록체인 법칙의 위반 여부는 너무나 객관적으로 판단 가능해서, 여기에 대해 컴퓨터가 자동으로 예-아니오의 판단이 가능하다. 안타깝게도, 의도치 않게 "법의 형식"이 "법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서도 컴퓨터는 잔혹하리만치 냉정할 수 있다.

어떤 형태의 민주주의에서든, "선거 실시의 실패"는 정권이 법치를 포기했으며, 이로써 어떠한 통치 정당성도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하는 명백한 신호이다. 여기에 대한 해결책은 법치로 돌아가 다시 선거를 실시하는 것이다. 시민이 이 단순한 원칙에 동의할 수 있다면 내전을 피하고 정권은 임기에 따라 평화롭게 교체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부정 선거"라는 회색 지대가 존재한다. 많은 정부가 선거를 실시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모호성을 조성해 시민들이 합의에 도달하는 것을 막는다. 이 경우에도 선거는 정당성을 가지지 않는다. 양당제 국가에서 시민에게 주어지는 선택권이 얼토당토않다면 아무리 개표가 투명하게 이루어진다고 해도 결론적으로는 선거가 조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선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DINO(이름 뿐인 민주주의)는 결국 소수에 의한 통치를 은폐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파벌주의에 흔들리지 않으며 부정부패에 내성을 가진 프로세스를 채택해 다수 시민의 합의를 확실하게 반영해야 한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헌법조차도 시민의 권리를 보호할 수 없다. 이들의 부패와 유착 앞에서는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의 분립도 소용이 없다. 각계의 인물들이 모두 한통속이라면 어떻게 권력 분립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법치의 정신은 시민의 마음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어야 하며, 쉽게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 민주적 절차를 위반했는지 판별하는 것이 대수로운 일이 아니어야 한다. 나아가, 이러한 위반을 바로잡기 위해 시민들이 새로운 선거를 실시하고 새 지도자를 뽑는 것까지도 대수로운 일이 아니어야 한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고 있는 법이란 "권력을 쥔 자들이 통과시킨 법안들"이 아니라 민주적 절차 그 자체로서의 "법"의 총체를 말하고 있는 것임을 기억하길 바란다. 진정한 민주주의적 절차란 "인간이 만든 법"의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절차이며, 시민들은 새로 만들어진 규칙이 민주적 원칙을 위반하는 것인지 쉽게 판별할 수 있어야 한다.

직접 민주주의

직접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시민들이 자신의 대표자에 모든 걸 의탁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고안되었다. 모든 법이 시민의 직접 투표에 부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만 본다면 직접 민주주의만큼 대표자의 부패를 막기 좋은 시스템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여기에도 짚어져야 할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시민의 투표에 부쳐질 법률은 누가 입안해야 하는가? 누가 시민들에게 이 법률의 "의미"를 설명해야 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합리적으로 무지하다. 상정된 법안들의 취지와 내용을 이해하는 데 개인이 들이게 될 시간적 비용이 그 개인이 투표 결과에 미치게 될 영향에 비해 턱없이 크기 때문이다. 선출된 국회의원들조차 항상 모든 법안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후 입법 투표를 하지는 않는다.

이런 시스템은 법안을 홍보하기 위해 들인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을 만큼 그 이익을 실현하고자 하는 특수 이익 집단에 의해 지배당할 것이다. 더구나 미디어는 법안을 만드는 과정은 물론, 어떤 법안에 시민의 이목을 집중시킬지까지 통제하면서 시민의 마음 속에서 법이 가지는 "의미"를 변질시킬 것이다.

직접 민주주의를 효과적으로 시행하는 데에는 기술적 토대가 필요하다. 아무래도 투표가 훨씬 자주 실시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자기 폭풍(태양풍)이나 EMP가 전자 및 컴퓨터 시스템을 교란해, 이 기술적 토대가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도 주의해야 한다. 취약한 기술적 기반 위에 세워진 사회는 위태롭다. 또한 기술은 물리적으로 취약할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사람을 과정으로부터 분리시킬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블랙 박스 속에 담긴 기술적 절차에 종속되고 만다. 이런 사회는 기술 전문가들에 의존하지 않고는 굴러갈 수 없는 사회이므로, 시민은 부정 부패를 감지할 능력을 박탈당한다. 또한 기술은 삶의 미시적인 부분들을 의식하지 못한다. 아미시파(Amish)가 받아들일 수 없는 기술이라면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시킬 수 없다.

직접 민주주의는 부패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한계도 있다. 입법에 있어서는 그 무결성을 입증할 수 있는 직접 민주주의를 적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행정부와 사법부에 대해서는 직접 민주주의를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행정부와 사법부는 해석에 의존해 법을 집행하고 분쟁을 심사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고려한다면 직접 민주주의에서도 시민의 합의 도출은 어려우며 오히려 여론은 분열될 것이란 결론이 나온다. 51%의 승자가 나머지 49%의 권리까지 독식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며, 가결 정족 지지율을 70%로 높인다면 그 어떤 법도 통과되지 못하고 현 체제의 폭정이 지속될 것이다. 낮은 변화율을 용인한다 하더라도 70%의 여론이 기초 법안에 과연 어떻게 찬성할 수 있을까? 스케일러블한 합의 도출 프로세스의 부재는 직접 민주주의의 가장 큰 문제이다.

진정한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목적이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라면, 민주주의는 다음의 속성을 가져야 한다.

  1. 독립적인 개인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2. 여기서 "독립적"이란 소수자들이 분리 독립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뜻한다.
  3. 소수자(0.01%)에 의한 통치에 내성을 가진다.
  4. 구조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제공 받은 구성원에 의해 그 존폐가 위협당해선 안 된다.
  5. 지역적 지식을 모아 집단적 지혜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6. 개인이 모든 걸 알아야 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7. 개인에게 더 많은 자율권을 부여한다.
  8. 다수자를 소수자로부터 보호한다.
  9. 소수자를 다수자로부터 보호한다.
  10. 오류가 모두에게 투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11. 새로운 합의를 도출하는 시민의 능력을 신장한다.
  12. 현 체제에 대한 노골적인 편향이 없어야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은밀한 소수자의 포섭에 휘둘리지 않는, 다대다(多對多) 분쟁의 해결 및 타협 프로세스를 확립하고, 시민이 정글의 법칙에서 벗어나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소수자를 다수자로부터, 다수자를 소수자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체제여야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시민간의 참된 합의에 의해 권리가 신장되고 집행되는 절차이다.

우리의 경험은 DINO 체제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약속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에겐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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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True Democr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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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오스 커뮤니티 뿐 아니라 현실의 어느 분야분들도 꼭 읽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이오스는 큰나무의 씨앗이기에 점점 더 잘라고, 튼튼해질 기대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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