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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More Equal Animals - 12장

12장 - 부 vs 권력

부와 권력의 관계를 짚지 않고서는 민주주의와 권력의 탈중앙화에 관한 그 어떠한 논의도 의미가 없다. 돈에 세상을 지배하는데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이 대체 무슨 쓸모란 말인가? 모든 사람이 동일한 민주적 권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모든 사람이 동일한 부를 소유해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권력의 재분배는 부의 재분배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주제이다. 개인이 가진 힘(권력, 노동력)으로부터 부가 나오지, 부에서 이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부도 그것을 유지할 노동력 없이는 무의미하다. 세상의 모든 노동력이 세상의 모든 부를 만들어낸다. 지금까지 세상에 생겨난 모든 부는 누군가의 노동력을 통해 소모된 가치보다 많은 가치가 창출된 결과이다. 권력은 궁극적으로 정글의 법칙에 의해 발생하며, 부는 노동력 의해 창출된다.

힘을 단위 시간 당 투여된 에너지(P = E/초)라고 보는 물리학에 빗대어 이를 설명해보자. 부는 잠재 에너지, 축적 에너지, 저축된 돈이다. 힘은 단위 시간 당 생산하는 에너지, 혹은 세계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활용되고 있는 축적 에너지다. 모든 생명 현상은 천연 자원과 에너지(열/태양/등)를 좀 더 높은 수준의 에너지 상태(잠재 에너지/저축/지방 축적)로 변환시키는 메커니즘이라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저마다 다른 속도로 가치(에너지)를 생산해내는 태양열 패널이나 풍력 터빈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노동력을 어떻게 활용하고 이로부터 어떤 가치의 흐름(에너지)을 만들어낼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우리가 노동으로 타인의 배터리를 충전시킬 것인지, 우리 자신의 배터리를 충전시킬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산하는 "태양 에너지"를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데” 몽땅 다 써버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평소에 어느 정도의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비축해두지 않으면, 궂은 날씨가 오래도록 지속될 때 우린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모터 따위를 작동시키기 위해 “한꺼번에”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경우에는 그 순간에 생산하는 태양열 에너지만으론 부족할 것이다.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잉여 "태양 에너지"를 조금씩 모아 저마다의 배터리를 충전(저축/지방 축적)하는 것이다. 이렇게 충전된 배터리를 가지고 우리는 기나긴 겨울 밤을 버텨내거나, 순간적으로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위기 상황을 이겨낸다.

그러나 개인이 가진 배터리의 용량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이 배터리의 용량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든다. 예수도 이것을 알고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너희 자신을 위해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며 거기서는 도둑이 뚫고 훔치느니라. 오직 너희 자신을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서는 좀이 먹지도 녹이 슬지도 않으며 거기서는 도둑이 뚫지도 훔치지도 못하느니라.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거기에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마태복음6:19-21)”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교훈을 얻을 수 없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말은 믿음직한, 신뢰할 수 있는, 후한 사람이 되어 커뮤니티의 신임을 쌓으라는 말이다. 땅에 쌓아 둔 보물이 전부 사라지더라도, 하늘에 쌓아 둔 보물이 있다면 기사회생이 가능하다. 커뮤니티의 중요성이란 다른 게 아니다.

하늘에 쌓아 둔 보물은 전력망에 연결된 태양열 에너지 시스템과 같다. 내 배터리가 가득차고도 잉여 에너지가 남는다면 이를 전력망에 팔 수 있을 것이고, 배터리가 간당간당한데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껴 있다면 전력망에서 에너지를 꿔 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태양열 패널이 전력망과 연결되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에너지를 모아두어야 한다. 전력망도 항상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우리에게는 에너지 요금 협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레버리지가 필요하다. 개개인이 알아서 에너지를 비축해두지 않는다면, 에너지를 사야 할 때 전력 회사(사회)에게 바가지를 쓰게 될 것이고, 에너지 비축 능력이 없으면 에너지를 팔아야 할 때 가격을 후려치일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건전 화폐의 목적 중 하나가 바로 진정한 민주주의적 평화 조약을 통해 더 안전한 사회적 "전력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에너지는 열 에너지, 운동 에너지, 전기 에너지, 화학 에너지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사회학적 용어로 이 에너지는 돈, 사회 자본, 빚, 유형 자산, 지식, 로열티, 무기, 건강 등으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은 그 자체로 에너지 발전기인 동시에 에너지 변환기이다. 어떻게 시간을 쓸지, 어떤 것을 살지, 어떻게 돈을 아껴 저축을 할지에 대한 고민은 모두 에너지 발전량(노동력)과 에너지 소비량의 조절에 관한 고민이다. 이 고민을 소홀히 한다면 아무리 발전기를 돌려도 남는 에너지는 없을 것이다.

민주적 권력은 여럿의 개인이 저마다의 에너지 발전량을 일정 기간 동안 한 명의 개인에게 몰아주는 데서 성립한다. 이렇게 집중된 에너지는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 군대를 창설하는 데 직접 사용될 수도, 혹은 좀 더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하고 저장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다. 민주적 권력을 쥔 리더는 순종적인 시민이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에너지를 활용해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수많은 태양광 패널이 모여 만들어진 거대한 태양광 발전소를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욱이, 이 발전소의 에너지 발전량은 개개인이 가진 부의 크기와는 상관없다. 이들이 리더에 기꺼이 복종할 준비만 되어 있다면, 리더는 사회 극빈층들을 동원해 발전소를 돌릴 수도 있다.

경제적 권력을 가졌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에너지 발전량을 빌려올 수 있을만큼 충분한 에너지를 비축해두었다는 것을 말한다. (내게는) 가치가 낮은 것을 상대에게 주고 (내게는) 가치가 높은 것을 대신 취하는 것이다. 여기서 양자는 모두 자신이 이득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경제적인 권력은 투자란 수단을 거쳐 더 큰 경제적 권력을 획득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 권력은 타인을 지배하고, 이들로부터 쾌락을 얻는 데 소모되어버릴 수도 있다.

민주적 권력은 경제적 권력으로 변환될 수 있다. 시민에게 세금을 징수해 만들어낸 가치를 공무원의 에너지 발전량(노동력)을 구입하는 데 사용한다. 독재는 대개 에너지/저축을 소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작동한다. 시민이 자발적인 기여를 멈추면 독재자는 저축된 에너지에 의존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한다. 하지만 세계의 모든 저축된 에너지를 다 동원해도 협동하는 군중의 에너지 발전량을 배겨 낼 순 없다.

독재자가 시민의 에너지 발전량을 시민을 억누르는 데 이용하고 있다면, 존 골트(John Galt)의 맹세를 실천하는 것이 이에 대한 솔루션이 될 수 있다. “내 삶에, 그리고 삶에 대한 내 사랑을 걸고 서약하노니 나는 타인을 위해 살지 않을 것이며 타인에게 나를 위해 살 것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군중의 횡포가 됐든 왕의 독재가 됐든, 거의 모든 독재는 경제 붕괴와 함께 막을 내린다. 존 골트는 파레토 분포 상의 상위 4%의 사람들을 향해 “지구의 모터를 꺼버리기 위해” 총파업에 돌입할 것을 촉구한다. 전체 발전량의 64%를 기여하는 상위 4%에 대한 과세 표준만 없애면, 정부는 경제적 용병들로부터 노동력을 구입할 경제적 권력을 잃게 된다.

"과세 표준"이란 개념은 정부가 당신으로부터 걷어가는 돈 보다 큰 의미를 갖는다. 당신이 지역 발전소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핵심인력이라고 해보자. 정부는 이를 이유로 당신의 월급 중 50%를 세금으로 떼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노동력과 재능은 발전소가 당신에게 쥐어주는 월급에 비해 훨씬 더 큰 가치를 가진다. 이게 아니라면 발전소는 사실 손해를 보면서 당신을 직원으로 두고 있는 것이다. 사회가 이러한 잉여 가치를 동원해 사용해 당신을 억압하는 경우, 당신이 통치자를 위해 생산하는 가치와 사회가 당신에게 제공하는 가치 사이의 차이 만큼이 당신이 부담해야 할 실제 세율이다.

사람은 노동이나 창작을 통해 자신의 에너지를 부로 변환한다. 사업가가 $1를 지불한 인력으로 $2의 가치를 창출한다면 그만큼의 부의 집중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업가가 총 $100로 100명의 직원을 고용한다면 $200의 가치가 만들어질 것이다. 100명의 사람이 가진 부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부가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 셈이다. 파레토 법칙과 연관시켜본다면, 상위 1%가 전체 중 50%의 부를 통제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사업가가 없다면 이 100명의 사람들은 실업 상태에 놓이거나, 혹은 다른 일로 $100에도 못 미치는 돈을 벌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만큼 사회는 노동력을 가치로 변환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아무도 에너지 발전을 하지 않는다면 사회의 부(축적된 에너지)는 쇠퇴해 갈 것이다. 부는 가만히 두면 방전되는 배터리와 같다. 자신이 지구 상에 마지막 남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보자.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가 100% 당신에게 있지만, 당신은 1인분의 노동력만을 가지고 있다. 이 경우 당신이 가진 부는 어떻게 될까? 결국엔 당신이 보물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결국 “좀이 먹고 녹이 슬어” 파괴되지 않을까?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 사실이 사람들을 빈곤으로부터 구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고민함에 있어서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미 있는 부가 중요할까, 아니면 노동력이 중요할까? 사람들이 책임을 가지고 자신이 가진 힘을 개인의 독립성을 확보하는 데 사용하기 시작한다면 저축은 늘어날 것이고, 독재자의 경제적인 권력을 흔들 것이다. 독립성이 커질수록 에너지 발전량을 착취당하지 않을 능력도 커진다.

내가 이번 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권력(노동력)이 결국 모든 권력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부는 지속가능한 권력의 원천이 아니며, 부의 평준화는 사회의 배터리를 방전시킬 뿐이지 사회 구성원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편향적으로 분배되는 것을 고치지 못한다. 시민이 자신의 부를 지키고자 나서는 경우, 부를 평준화하려는 시도는 거대한 경제적 합선을 일으킬 것이다. 시민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모두 리더에게로 흘러가고, 리더는 이를 역으로 활용해 그들이 자신을 위해 에너지, 경제적 권력, 개인의 독립성을 축적하는 것을 막는다.

하지만 경제적 권력도 결국 태양열 패널에서 나와 배터리에 축적되어 있다가 흘러들어온 에너지에 의해서 유지될 수밖에 없다. 경제적 권력조차도 시민이 배터리를 꺼버리는 순간 무용지물이 된다. 세상의 모든 부는, 사람들이 그 부의 소유자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동기를 잃는 순간 무력해진다. 또한 사람들의 노동력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에 관한 창의적이고 기업가적 통찰이 없이는 부의 소유자는 사회의 부를 증대시킬 수 없다.

기업의 노동자 착취

기업은 노동자에게 그들이 생산하는 것보다 더 적은 비용을 지불함으로써 "착취"하는가? 한 번 살펴보자.

1,000명의 직원이 각각 $10의 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고 해보자. 이 회사는 "최저가 입찰자"로서 직원에게 돈을 지불한다. 만약 최저 입찰가가 $1라면 회사는 직원 한 명의 노동에서 $9를 벌어들이는 셈이다. 이것은 착취인가, 아닌가? 직원 1,000명이 힘을 조직하지 못한 결과, (조직된 힘을 가진) 회사로 권력의 편향이 일어난다. 만약 이 1,000명의 직원이 힘을 조직할 수 있다면 회사로부터 자신의 노동에 대한 대가로 $9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이 경우에도 회사는 직원 한 명으로부터 $1의 이득을 얻는다). 전형적인 죄수의 딜레마이다.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취하려면 이들이 어떻게 협동해야 하는지가 이 지점에서 떠오르는 질문이다.

반대의 상황을 생각해보자. 식량 생산자나 의상 제작자가 담합하여 제품의 가격을 올린다. 담합을 통한 가격 인상은 독점 상황을 만들면서 가능한 것이다. 고용주들의 시장 독점은 결국 노동자의 시장 독점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애초에 왜 고용주가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지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직원에게 지불하는 급여의 10배에 해당하는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시장에는 높은 마진율에 혹한 경쟁사들이 머지않아 몰려들 것이다. 이 경쟁사들은 자신들이 감당하고 있는 리스크를 저울질하며 직원의 급여는 인상하고 고객에겐 더 싼 가격에 상품을 제공할 것이다. 결국 이런 후발 주자들은 더 큰 자본을 가지고 있는 사업자에 비해 자신이 가진 노동력을 활용하는 데 있어서 더 불리할 수밖에 없다.

마을 유일의 굴착기를 보유하고 있는 건설회사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굴착기 한 대가 한 시간 안에 퍼낼 수 있는 흙의 양이 100명이 한 시간 동안 삽질을 해서 퍼낼 수 있는 양과 동일하고, 이만큼의 흙을 퍼낼 때마다 $100를 벌 수 있다면, 이 회사는 기사 한 명을 $1에 고용해 굴착기를 돌릴까, 아니면 일반인 100명을 인당 1$에 고용해 삽질을 할까? 당연하게도 이 회사는 굴착기를 돌려 시간당 $99달러의 마진을 벌어들이는 선택을 할 것이다. 이것은 착취인가? 이 회사가 이 사업에 투자하는 비용에는 운전기사의 임금 외에도 굴착기를 구입할 때 들인 비용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 회사가 실제로 수익을 내기 시작하는 것은 땅을 파낸 값으로 굴착기 구입 비용을 만회한 시점부터이다.

경쟁이 존재하는 한 시장은 알아서 균형을 찾는다. 복수의 독립적인 공급원으로부터 자원이 조달될 수 있을 때 경쟁은 성립한다. 굴착기를 보유한 위의 회사가 다른 회사의 굴착기 사용을 막는다면, 이 시장에서 경쟁은 발생하지 않는다. 사업 영역을 독점한 자가 노동을 지배한다. 지적 재산권(IP)이란 법적으로 허용된 독점에 불과하며, 따라서 지적 재산권의 소유자는 노동을 지배한다. 지적 재산권에 대해서는 뒷장에서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한 사회 안에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얼마나 정착했는지는 시민이 새로운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측정될 수 있음은 앞에서도 살펴보았다. DINO는 새로운 합의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민의 권리를 침해함으로써, 기존의 합의에 대한 자신의 독점 상태를 유지하고자 한다. 이 책은 어떻게 시민이 스스로를 조직해 새로운 합의에 도달할 능력을 갖추고 세상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어떻게 죄수의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지를 고찰하는 책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방법들이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노동자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

노조의 결성이 여기에 대한 가장 전형적인 답변이 될 수 있다. 회사가 필요로 하고 있는 기술을 독점하겠다는 목표로 노동자들이 힘을 합쳐 협상력을 키운 것이 노조이다. 노조가 정말로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를 평가하려면, 우선 이것이 민주주의의 원칙과 도덕적 해이 최소화의 원칙을 따르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노조의 가입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가? 그렇지 않다면 민주주의의 원칙이 위배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회원이 동일한 조합비를 납부하는가? 그렇다면 디너 파티에서 모두가 같은 값을 내고 저녁을 먹는 상황에서와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하지만 디너 파티에서는 모두가 최대한 비싼 것을 먹고자 하겠지만, 노조에서는 모두가 최대한 일을 덜 하고자 한다는 데 둘 사이의 차이가 있다.

조합비가 올라갈수록 직원 당 생산성은 점점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노조를 이끄는 사람은 식당 주인처럼 모두에게 동일한 조합비를 요구할 것이다. 노조를 만들 생각인가? 그렇다면 그 노조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원칙에 입각해 운영되어야 한다.

착취는 주관적 개념이지만 기본적으로 고용주가 직원의 노동으로부터 “과도한” 이익을 챙기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개별 직원이 회사에 이득을 가져다주고 있는지를 측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만 우리는 직원의 급여 대비 생산성이 파레토 분포를 따른다고 추정할 수 있다. 회사로서 붙잡고 있는 게 이득인 직원과 손해인 직원이 따로 있을 거란 이야기다. 족벌 경영이나 분식 회계가 일어나고 있는 경우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서, 사업주는 회사로서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이 "순손실"인 직원을 가려내고 해고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경영진이 보상패키지(compensation)을 통해 주주를 기만하는 경영 형태는 도덕적 해이의 또 다른 사례이다.

모든 부는 시민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 그리고 죄수의 딜레마가 해결되지 못하면 이 부는 극소수에 의해 장악되리란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있다. 이 잉여의 부를 기업 소유주의 정당한 노동과 리스크 테이킹의 대가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유한 책임의 보호가 없었더라도 이 기업 소유주가 그만큼의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었을까? 이 소유주는 사업 과정에서 외부화된 모든 비용에 대한 책임을 사회에 전가하고 있지는 않은가? 정식 고용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기업에 대한 개인의 종속 현상의 사회적 비용은? 시민이 기업에 예속된 상태에서도 진정한 민주주의는 지속가능할 수 있을까?

가장 적은 임금으로도 기꺼이 일할 수 있는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는 가장 효율적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가장 적은 부를 소모하면서 가장 많은 부를 만들어내는 방법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사람처럼 당장 일자리가 급하고, 사회에 가치를 기여할 다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의 노동으로 만들어낸 부는 결국 부의 파레토적 집중으로 이어지게 된다.

요컨대, 단순히 직원에게 쥐어주는 급여의 열 배가 넘는 수익을 회사가 챙겨간다고 해서 착취인 것은 아니며, 노조화도 결국 도덕적 해이로 인해 사회에 별다른 이득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다시 평평하게 만들고자 한다면, 주식으로 직원을 보상하거나 이윤을 배당하는 등의 방법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보통 한 회사의 이윤은 사업주의 투자(굴착기)를 통해 발생하는데, 모든 형태의 강제적인 이윤 배당은 굴착기를 사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은 직원들이 굴착기를 부분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경제적 권력에 의한 민주주의의 전복

사회적 질서와 소유권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사회에서는, 부유층이 자신의 경제적 권력을 활용해 정치적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 이것은 시민의 의존성을 증가시킴으로써 가능한데, 이 의존성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는 순간부터 부유한 소수는 의한 시민의 에너지 발전량을 착취하기 시작한다.

30년 동안 한 회사에서 한 가지 일만을 해온 직원은 회사에 사실상 종속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 회사는 이 직원의 급여를 올려주지도 않으면서 생산성을 계속해서 착취할 수 있다. 독립을 위해 이 직원에게 필요한 것은 일정 기간의 저임금, 혹은 무직 상태를 견뎌내며 지금까지 자신을 먹여살려준 회사 없이도 가치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간을 견뎌낼 돈이 저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 직원은 앞으로도 노예처럼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 자신이 생산해내고 있는 부가 그 자신을 노예로 만들고 있는 것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상대적 우위에 의한 통치, 낮은 중첩도와 강한 모듈화의 원칙이 작동하고 있으며, 정치 플레이오프가 권력의 집중을 차단하고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사회를 떠올려보자. 하지만 이 사회의 모든 사람이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누군가가 자신이 가진 막대한 부를 이용해 정치 플레이오프의 꼭대기로 올라간다면? 너무나 많은 사람이 한 회사에 종속되어 독립에의 의지가 꺾여버렸다면? 이런 상황에서라면 시민들은 자신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는 회사를 구제하는 대신 진정한 민주주의를 포기할지도 모른다.

기업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적이며, 모든 형태의 진정한 민주주의는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규칙과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기업을 자발적 커뮤니티를 만드는 또 하나의 수단쯤으로 여기는 이상, 이 일은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기업이란 주주가 리더를 선택한다는 합의 절차를 따르는 집단이다. 누구 한 명이 51%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은 영토 없는 왕국과 다름없다(지적 재산권을 가상의 영토라고 생각한다면 영토가 있는 왕국일 것이다). 이 왕은 자신이 거느리는 백성의 숫자를 늘림으로써 왕국을 확장한다. 이 백성(직원)의 생산성이 높아질수록 왕국에 쌓여가는 부도 커진다. 왕이 모든 영토(회사의 부동산)를 소유하며 백성들은 왕에게서 소작료를 받아 이 영토에서 농사를 짓는다. 기업과 직원의 관계는 봉건제에서 영주와 농노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적 재산과 사업 라이센스는 오늘날의 봉건 영지이다. 작은 차이가 있다면, 오늘날의 직원들은 이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큰 기업일수록 자사의 직원이 경쟁사에게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한다.

기업이 아무런 제한 없이 규모를 키우고, 일자리와 상품에 대한 시민의 의존도를 볼모로 산업을 독점할 수 있게 허용한다면, 아무리 투표로 왕을 뽑는 민주적인 사회라 해도 그 구조는 본질상 봉건제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따라서 평화 조약에는 기업의 과대 성장을 막을 수 있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보편화된 독과점 방지” 시스템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에서, 각 커뮤니티는 자신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한 대책을 강구한다. 이 대책에는 외국으로부터의 수입을 금지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기업으로부터의 "수입"을 금지하거나 여기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포함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너무 크게 성장하고 있는 기업에 대한 노동 “수출” 금지도 가능하다. 대기업은 외국의 커뮤니티로, 그 직원은 그 커뮤니티의 구성원으로 빗대어 볼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지역 커뮤니티의 구성원으로 지내는 동시에, 이 지역 커뮤니티와는 전혀 상관없는 회사에서 직원으로 일할 수는 없다.

진정한 민주주의에서는 거대 기업이 존재할 수 없다. 현대식 거대 편의점 체인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이는 엄청난 변화일 것이다. 규모의 경제는 수십억 달러의 설비 투자를 필요로 하는 제조 공정을 가능케 했다. 우리가 거대 기업의 성장을 막는다면, 이러한 공장들은 더 이상 생겨날 수 없으며 아이폰 같은 물건도 더 이상 삶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50,000명 규모 커뮤니티의 생산 능력이 축적되어, 외부의 별다른 조력 없이 자신들만의 아이폰 생산 센터를 지을 수 있을 만큼의 생산성이 커진다면 이런 작은 커뮤니티가 자체적으로 아이폰을 갖는 것도 꿈만은 아닐 것이다.

애플은 (시가총액 순)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 중 하나이며, 높은 중첩도의 긴밀하게 통합된 생태계를 만듦으로써 굴러가는 회사이다. 애플은 반도체 생산에서부터 결제 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통제한다. 이들의 생태계에 한 번 진입하게 되면, 이 시스템 바깥에서 제품을 상호 운용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려워진다. 애플은 성장을 거듭해가며 경쟁자들을 자신들의 생태계 밖으로 몰아냈다. 그리고 이 생태계 안에 남아 애플의 고객층에 접근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30%의 애플세를 부과했다.

애플의 사례는 독립 커뮤니티 건설이란 주제에서 꼭 살펴봐야 할 사례이다. 애플은 잡스 대왕으로부터 왕권을 세습한 쿡 대왕이 지배하는 커뮤니티다. 애플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만든, "벽이 둘러 쳐진 정원"에 계속 남아 있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하며, 공격적으로 공급망의 수직 통합을 추구한다. 애플은 거대한 비민주적 자발 커뮤니티의 사례이다. 그리고 사회는 지적 재산권을 수단으로 애플과 같은 기업에게 독점을 허용한다.

시민의 독립성을 지켜주는 진정한 민주주의라면 이러한 기업주의에 대항할 수 있어야 한다. 대기업이 제공하는 재화와 서비스는 사회도 마찬가지로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보다 탈중앙화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혁신이 필요하다. 기술의 첨단화라는 유혹에 빠져 기업의 대형화를 허용하는 것은, 삶의 안락함에 취해 진정한 민주주의를 버리고 기업의 노예가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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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 - Wealth vs. Power :+1: :+1: :+1: :+1: :+1: :+1: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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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을 기준으로 생겨난 돈이 권력을 잡고 역으로 노동을 통재하는 현재에 대한 고민 공감합니다… 점점 더 흥미로뭐지는 More Equal Animals…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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